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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메리디안 180, 글로벌 대학의 실험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조한혜정 명예교수, 2015.04.07)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5-07-10 14:20:48

[조한혜정 칼럼] 메리디안 180, 글로벌 대학의 실험 

 

‘메리디안 180’이란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본초자오선 0도의 반대편을 말한다. 그리니치 천문대가 자정이 되면 정오가 되는 곳이다. 코넬대 로스쿨의 애널리스 라일스 교수팀은 2012년 이 이름을 딴 실험적인 싱크탱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환태평양 지역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주시하며 당면한 문제를 제대로 풀어내기 위해 전지구적 소통의 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이다. 1990년대 중반 동아시아 지역 인문사회과학자들과 함께 비슷한 시도를 했었던, 그리고 그 활동이 아시아 금융위기와 중국의 급부상 와중에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고 저명 학술지 출간 정도로 축소되는 과정을 지켜본 연구자인 나에게 이들의 시도는 주목을 끌었다. 다양한 포럼이 동시에 진행되는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번역이다. 풍부한 배경 지식을 지닌 연구원들이 즉각 번역을 해내는 다중 언어 플랫폼을 운영함으로써 언어 장벽을 낮추고 국가와 문호, 그리고 전공 분야를 나누는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로부터 배우고 실험하는 작업을 하겠다는 의도에서이다. 메리디안 180 팀은 작년 말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과 파트너 관계를 맺고 지난주 3월31일에 첫 오프라인 모임을 가졌다. 

 

이번 학술회의 주제는 ‘고령화 사회의 민주주의’로 한국의 경제학자 전성인 교수가 문제를 제기했다. 전 교수의 발제를 읽고 참여연구자들이 1650자 이내의 글을 웹에 올리면, 그 코멘트는 곧바로 한국, 중국,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되어 700여 회원들에게 보내지고 웹 플랫폼에 쌓인다. 31일에는 글을 올린 각국 회원 25명이 한자리에 모여, 가치와 윤리, 재분배 정책, 공평성의 정치라는 세분화된 주제로 참여자들이 5분씩 생각을 발표한 뒤 자유 토론으로 회의를 진행하였다. 전 교수는 발제에서 노인의 비중이 이토록 높고 급한 증가 추세를 보인 시기는 인류 역사상 없었다며 노인세대가 정치 영역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이해집단으로 부상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생산 영역에서 멀어진 노년층이 정치 영역에서 다수를 점할 경우,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기는 힘들며 더구나 기성세대가 엄청난 재정 적자와 오염된 환경을 후대에 물려주고 안전이 확인되지 않은 핵 관련 실험을 감행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민주주의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각국 참여자들 모두 전후 경제성장을 담당했던 베이비붐 세대가 현재 대부분의 부를 소유한 반면에 자녀 세대는 경제 자립조차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현실을 우려했다. 이런 염려를 공유하면서 한국의 사회학자 조성남 교수는 ‘새로운 효 문화’를 역설하는가 하면 미국의 인류학자 조지 마커스 교수는 ‘부로 통치하는 층’, 곧 상위 1퍼센트의 자본가와 전문 노동을 통해 일정한 부를 축적한 10~15퍼센트의 ‘세습적 중산층’이 자녀에게 부를 이전하는 계급 재생산 과정을 세밀하게 파악해서 불평등 구조를 바꾸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인 빈곤율 50퍼센트인 현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 문제는 세대 갈등 이전에 계급 재생산의 문제이며, 국민 개개인이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곧 의식주와 사회활동을 가능케 할 시민수당 논의로 이어가야 할 생명정치 차원의 문제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초고속 고령사회가 되고 있는 동아시아권에서는 특히 가족주의와 입시교육으로 인해 세대 간 미묘한 적대와 불신의 감정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논의도 있었다. 학회는 이런 다양한 논의들을 성급하게 모아내기보다 서로를 관찰하며 펼쳐놓은 분위기로 이루어졌다. 

 

글로벌 위험사회의 복합적 해법을 제시하는 논의의 장이 절실한 지금, ‘메리디안 180’ 포럼과 같은 실험적 프로젝트가 실질적으로 동아시아의 난제를 풀어냄과 동시에 대학 교육과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을 기대해본다. 전망 없는 직업훈련소로 전락하고 있는 대학에서 시대적 실험의 장에 기웃거릴 짬을 낼 수 없는 한국 대학교수들의 피로한 모습이 유난히 눈에 밟히는 하루였다.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원문기사 링크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5832.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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