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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석사 2024 김민수 산업 자본주의와 기술 봉건주의의 경계에서: 국내 인쇄업 생태계에 대한 문화기술지
작성일
2024.09.05
작성자
문화인류학과
게시글 내용

 본 논문은 한국의 인쇄업 생태계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 시도이다. 최근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논의는 기존의 금융 자본주의(Financialisation)를 중심으로 한 담론의 지형을 보다 확장시킬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것들은 부분적으로는 서로 교차하고 중첩되면서, 각각이 더욱 강조하는 특징에 따라 지대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나 기술 봉건주의(Techno Feudalism)와 같은 이름으로 명명된다. 이런 논의들은 기존의 금융 자본주의에 관한 설명이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두드러지는 불로소득 동학이나, 클라우드 영지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플랫폼 기업들의 영향력에 관해 충분한 이해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이로부터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인쇄업에 대한 공시적 분석과 현장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양상은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논의에서 강조하는 특징들이 서로 착종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본 연구는 신자유주의 금융화, 지대 자본주의, 그리고 기술 봉건주의와 같은 논의들에서의 특징이 전통적인 산업 자본주의의 언어들과 여전히 갈라지지 않은 채, 국내 인쇄업 생태계를 어떻게 재구성 하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 연구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특정 국가의 산업과 참여자들의 일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재조직해내고 있는지에 주목하며, 이를 국내 인쇄업에서 디지털 인쇄 기기가 보급되는 과정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본 연구를 위해 연구자는 2018년 1월부터 2021년 5월까지 서울의 한 인쇄소에서 근무하며 현장연구를 수행했고, 2018년 7월엔 세계 최대 디지털 인쇄기기 제조업체 AP가 운영하는 싱가포르의 홍보센터에 방문하여 참여·관찰 및 방문자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후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총 세 차례에 걸쳐 아날로그와 디지털 인쇄업 및 각종 인쇄 후가공 업체에 종사하는 인쇄업 참여자들 17명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후속 연구를 수행했다.

 인쇄업에서의 디지털화는 기술과 자본이 결합된 초국적기업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클릭차지(click-charge)라는 새로운 형태의 요금 징수 체계가 만들어져 있었다. 클릭차지는 아날로그 인쇄업에서는 볼 수 없던 방식으로, 디지털 인쇄 기기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대부분의 회사들이 도입하고 있는 요금제도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디지털 인쇄기기의 유지·보수에 관한 기술 일체를 독점하고, 이로부터 인쇄업체를 효율적으로 통제함으로써, 클릭차지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대’를 추출해내고 있었다. 그들의 이윤축적 방식은 전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구조로 설계되고, 그렇게 파생된 이윤을 전유해가는 과정을 통해 글로벌 자본과 중소 인쇄업체 사이에 위계관계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영과 노동의 의미 또한 달라지고 있었다. 인쇄업 경영자는 스스로를 ‘소작농’과 ‘노예’에 비유할 정도로 자신들이 겪는 수탈의 경험이 크다는 것을 드러내는 동시에, 여전히 인쇄 노동자를 착취하는 ‘수탈과 착취의 중첩’된 구조 속에 놓여 있었다. 이로부터 노동자는 그러한 구조에 노출되어 새롭게 재편되고 있는 자본주의 위계서열의 맨 끝에 자리하게 된다.

 한편, 인쇄업에서의 디지털화와 이에 따른 자동화로 인해 인쇄노동이 사라지거나, 기술적 실업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인간노동의 역할은 비물질적이고, 더욱 능동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인쇄기기의 발전과 디지털화는 기계에 대한 끊임없는 관리·감독과, 그것을 보다 효율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창조적 수행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날로그 인쇄업에서 이루어지는 육체적인 노동의 강도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인쇄노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끊임없이 발전하는 디지털 기계들에 대한 조작과 숙달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었다. 인쇄기기를 조작하는 직접적 노동은 점차 그것을 통제하는 컴퓨터에 대한 숙련 기술로 변화하며, 기계에 종속되는 것을 넘어 그것을 다루는 능동적 주체로의 전환을 의미하게 된다.

 또한, 인쇄업에서의 디지털화는 여전히 산업 자본주의의 바탕이 되는 요소들과 분리되지 않은 채, 인쇄업 생태계를 끊임없이 재조직해내고 있었다. 최신의 디지털 기술을 탑재하여 더욱 거대하고 육중해지는 인쇄기계의 배치에 관한 문제는 신자유주의적 도시 재편과 이에 따른 공간적 조정을 통해, 협업과 분업 중심의 인쇄업 집적구조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자본의 집중 및 기술적 우위를 선점한 대형화된 소수 업체에 의한 독점적 경쟁구조가 나타나고 있었고, 이들은 디지털과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표준화된 견적 시스템과 결제 방식을 도입해 인쇄업의 지형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로의 전환 속에서 갈수록 고령화되는 인쇄업 참여자들의 세대교체에 대한 요구 또한 높아지고 있었다. 이는 기존 노동자들의 퇴출의 문제와 이들을 대체할 청년 세대의 부재 속에서, 가업 승계를 중심으로 한 인쇄업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소규모로 분업화된 협업 구조와 이를 바탕으로 한 가족 중심 문화로 설명되는 인쇄업에서의 고용-피고용의 관계는 인쇄 노동에 대한 보다 다채로운 해석을 가능케 했다. 가족이라는 언어 속에서 인쇄 노동은 고용의 관계를 희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장 잔인한 형태의 착취의 가능성을 내포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는 산업 자본주의와 기술 봉건주의의 경계에 있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양상이 한 국가의 특정 산업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그 안의 참여자들의 역동성과 주체성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보는데 초점을 두었다. 기술과 금융의 발전, 그리고 이로부터 등장한 소수의 거대 자본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의미를 명확하게 포착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본 연구는 인쇄업에서의 현장연구가 갖는 구체성과 입체성을 통해,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여러 논의들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에, 연구자는 자본주의의 변형에 관한 논의가 현실세계의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살펴보는 과정 속에서 새롭게 검토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A에서 B로의 변화’와 같이 단순한 서술로 설명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다양한 논의들이 서로 교차하고 중첩되는 맥락 속에서 온전히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핵심되는 말: 금융자본주의, 지대자본주의, 기술봉건주의, 인쇄업, 인쇄노동, 디지털 인쇄, 클릭차지, 초국적기업, 착취, 수탈


지도교수: 이상국